무너지는 대도시, 초회복을 위한 지역의 재발견
- tesspark
- 2020년 8월 11일
- 10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0년 8월 14일
본 글은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어크로스, 2020) 으로 출판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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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도시는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의 대도시도 처음부터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시의 기능은 늘 변화하는 것이다. 거기 맞춰 형태도 변화한다.
도시의 승리: 효율과 혁신의 생산 기지
산업화 시대 도시는 효율과 혁신의 상징이었다. 기술 혁신 뿐 아니라 사회 관행의 혁신과 민주주의 확대 등 정치혁신도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도시가 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생산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대표적인 시기가 미국의 혁신기(Progressive Era)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도시화와 산업화로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당시 미국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화율이 40%까지 상승했다.[1]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기업은 감독과 감시 없는 자유로운 자본의 힘을 끝도 없이 행사할 수 있었다. 기업은 덩치가 커지고 경제 규모는 빠르게 성장했다.
물론 그늘도 있었다. 당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는 거의 없었다. 기업의 독점은 심화하고 노동자들은 대거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았다. 그러면서 개혁 조처가 나오기도 했다. 미국이 소수기업의 독과점을 강력하게 막는 법률을 만들고, 국영사업을 통해 기업을 규제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권익을 대표하던 노동조합이나 19세기 말부터 도시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결사체들이 탄생하면서, 도시는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의 공간이 되었다.
‘도시의 승리'는 이렇게 점점 뚜렷해지며 현대로까지 이어진다. 생산의 혁신은 차차 재생산의 혁신으로 이어진다. 일자리가 있기 때문에 돌봄과 복지도 촘촘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젊고 똑똑한 노동력이 몰려들기 때문에 대중문화도 발달한다. 인구가 많기 때문에 최첨단의 교통과 주거 양식이 생겨난다. 정치에서도 시민운동에서도 가장 앞선 흐름이 도시로부터 나오게 된다.
우리는 왜 도시에 사는가? 이제 여기에 대한 답은 비교적 단순해졌다. 도시의 편의성, 안전성 등 도시의 서비스 때문이다. 직장에 대한 접근성이 좋고, 생활 편의성이 좋아서다.
즉 도시의 매력은 생산의 거점이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생산과 일자리는 도시가 매력을 갖게 된 원천이다. 교육, 교통, 문화, 상권, 의료 등 다양한 서비스는 도시의 매력을 확장시켰다. 여기에 더 고려해야 할 점도 있다.
눈에 보이는 일자리와 서비스까지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작동원리도 있다. 도시가 가진 복잡한 네트워크적 성질에 기반을 두는 원리다.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면, 그들 사이의 교류와 상호작용에 의해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공동체의 힘으로 도시의 활력이 높아진다. 이런 활력이 다시 혁신의 원천이 된다. 도시는 결코 계획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 않으며, 그 안의 모든 요소들, 즉 시민들과 시설 하나하나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만들어진다. 성공한 현대의 도시는 여기까지 이뤄내고 생산으로부터 공동체의 혁신까지를 이뤄낸 곳이다. 그 원천은 시민들 사이의 접촉과 교류와 자발적 공동체 형성에 있다.
정부가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일자리와 학교를 지방으로 이전시켜 ‘혁신도시'를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 혁신이 일어나고 매력적인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일자리와 학교는 이식할 수 있지만, 접촉과 교류를 단기간에 이식할 수는 없다.
물론 도시의 혁신이 밝은 면만 가졌던 것은 아니다. 대도시가 가졌던 수많은 문제들도 어쩌면 이런 생산과 혁신의 과잉으로부터 온 문제들이었다. 사람이 몰리고 혁신이 일어나니 매력은 더 높아지고 사람이 더욱 많이 몰렸다. 부동산값이 올랐고 원래 살던 사람, 원래 장사하던 사람은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일어났다. 청년들은 도시에 살 자리나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도시의 대기오염과 열섬현상과 같은 환경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땅 몇 평을 확보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중산층이 가진 앙상한 삶의 목표가 됐다. 자산이 없는 저소득자들에게는, 도시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팍팍해졌다.
비접촉 시대: 멈춰버린 생산, 사라진 혁신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문제들을 뒤집었다.
2020년에 벌어진 대도시의 봉쇄(Lockdown)는 도시가 가진 기본적인 기능과 가치를 뒤흔드는 초유의 사태였다. ‘접촉과 교류’라는 도시 혁신의 원천을 차단하는 조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보자. 밀라노에서는 매년 열리던 국제가구박람회(Salone del Mobile)가 취소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우려해서다.
국제가구박람회는 2019년에 전세계 181개국에서 38만명이 참석했던 행사였다. 1961년부터 열린 이 세계 최대 가구박람회는 밀라노가 세계 가구산업의 중심지이자, 가구 디자인 트렌드를 이끄는 도시가 되는 핵심 요소였다.
이탈리아에 등록된 가구디자이너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밀라노에 스튜디오를 내고 있는데, 이들은 박람회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접촉하고 교류하고 경쟁하며 세계와 만나고 연결하면서 경쟁력을 키우고 전세계 가구 디자인을 이끌었다. 그렇게 밀라노는 가구산업 혁신의 첨병이 됐다.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가구회사가 선보이는 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열렸다. 그러나 이제 가장 앞선 디자인 트렌드를 매년 봄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전세계 가구기업들이 이 박람회 참석을 위해 1년 계획을 세울 정도다.
그런데 ‘국제가구박람회'라는 플랫폼이 사라진다면, 밀라노라는 도시가 가구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을까? 전세계 최고의 가구 디자이너와 기업들이 접촉하며 교류하는 행사가 없다면, 여전히 밀라노는 가구 디자인의 혁신을 이끄는 장소일 수 있을까?
미국 뉴욕시에서는 2020년 5월까지 840만 명의 인구 중 37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도시 봉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최초의 자동차박람회인 뉴욕국제자동차전시회(New York International Auto Show)도 취소됐다. 1900년 이후 120년 동안 매년 열리면서 세계 자동차시장 트렌드를 이끌던 행사다. 이밖에도 교통기술혁신을 이끌던 지능형교통시스템 세계회의(ITS World Congress), 기업 인사혁신 담론을 주도하던 인적자원관리학회(SHRM) 컨퍼런스 등이 취소됐다.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처럼 혁신을 이끌던 대도시는 대부분 비슷한 형편이다. 예컨대 지식 교류 속에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 되었던 파리의 카페와 살롱은 바이러스 탓에 인적이 끊겼다.
도시가 혁신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원천인 ‘접촉과 교류’의 장이 사라지고 만다면, 도시는 여전히 혁신의 첨병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도시가 여전히 효율적인 생산 거점일 수 있을까? 효율적인 생산에 여전히 도시가 필요할까? 우리가 가진 도시,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의 이미지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대면접촉이 줄어드는 세태는 그 자체로 도시의 존재 의미에 의문을 제기한다. 비접촉, 비대면의 일상화로 재택근무와 온라인 교육이 뉴노멀(새로운 일상)이 된다면, 굳이 도시에 거주할 필요가 있을까? 도시 외곽이나 시골에 더 넓은 면적으로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혁신이 없는 도시, 인구가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시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
도로, 상가 등 도시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인프라가 필요없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해 자발적인 자가격리 기간이 길어지면서 좁은 집 안에서 갈 곳을 잃은 시민들은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무접촉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새로운 공간을 발굴하고 있다. 음식점이나 술집과 같은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공원이나 야외 공간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우리 일상을 지배하던 미세먼지 공포가 사라졌던 도심의 맑은 공기는 이러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기도 하였다.
물론 혁신이 없고 교류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나마 재정적 여유가 되는 수도권 도시의 사회보장시스템과 의료시스템, 일자리의 희망이라도 보이는 도시를 떠나는 선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역량을 통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은 도시의 외곽이나 지방의 윤택한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업 및 불평등한 상황으로 인해 지방재정에 의존하는 도시민이 많아질수록 시민들의 소비능력의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을 포기하고 소소한 소비를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도시의 젊은이들로 인해 도시재생의 가능성이 열려있긴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실직이나 이주,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자체가 축소되면 어쩔 수 없이 상권도 쇠퇴할 것이다.
재택근무로 인한 사무공간의 공유로 도심의 빌딩은 공실률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온라인교육이 강화되면서 학생들의 밀집도가 떨어지면 대학가의 낡은 소형 주택들부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저소득층이 증가하면 정책당국자들은 임대주택을 늘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부동산을 통한 자산증식은 차츰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도시가 가진 매력은 일자리와 교육 뿐만이 아니다.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본연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유기체라는 점이 어쩌면 더 큰 매력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인간 사이의 ‘접촉’과 ‘상호작용’은 앞으로도 진화를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 진화가 현재의 대도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시킨 상태로 일어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근대적 도시의 가치를 공간이 아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끌어내린 대표적인 도시이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라는 책에서 그는 20세기 초 혁신기의 인간적인 도시와 달리 20세기 중반의 도시가 잘못된 재생 프로젝트를 거듭하면서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도시 계획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식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반대하며 도시의 공동체 운동과 접촉하는 사람 중심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운동을 통해 사회운동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도시재생이나 골목, 걷기 좋은 도시 재생 프로젝트들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제이콥스가 20세기 중반의 도시를 비판하며 접촉과 상호작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했듯, 지금도 또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다.
포스트 코로나: 도시는 건강이다
인간은 어두운 전망을 보면서 대안을 만들곤 했다. 늘 위기 앞에서 경로를 바꿈으로써 결국 다른 미래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어두운 예측은 대부분 그다지 어둡지 않은 결과를 만들곤 했다. 물론 코로나19 이후 경제위기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저출산과 저성장은 예고된 미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출산과 저성장, 감염병과 같은 위기 속에서 우리의 경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서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계속해서 더 약해진 조건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니라 기능을 유지하면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만들 수 있는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초회복이다.
도시에서 초회복의 길은 어떻게 열릴까? 우선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가져온 ‘생산하는 도시' 패러다임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회색 도시로 되돌아가기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과거에서 벗어나, ‘건강한 도시'를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 특히 ‘건강한 도시’로 초회복의 경로를 선택하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의 강화와 협력을 통한 상생이다.
당장 도시들은 건강에 대해 더 많이 투자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방역과 백신 개발 시기가 시민들의 물리적 건강뿐 아니라 도시의 경제와 사회 전반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다시 다가올 감염병 대유행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공식이다. 당연히 정부는 공공의료시스템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될 것이다.
초기 도시의 성공이 위생시설의 확대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보면, 이는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주요 근대 도시는 13세기 이후 수 세기 동안 계속 되었던 페스트나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 ‘도시의 위생’ 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도시에 하수로를 건설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다. 그 뒤 병균으로부터 안전한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대규모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 속에서 접촉하고 교류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안전한 도시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의 잦은 교류는 새로운 문화와 기술의 창조로 이어졌다. 농촌과 달리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들이나 새로운 시각이 존재하고, 언제나 활기가 넘쳐나게 됐다. 농촌의 장은 5일에 한번 열렸지만 도시의 가게들은 연중 열렸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범위의 접촉과 상호작용이 일어났다.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도시는 비로소 건강과 번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번영이 앞서 살펴본 산업화 시대 도시의 승리를 가져온 발판이 됐다.
그러던 도시가 ‘감염병'이라는 새로운 도전자를 만나 쇠퇴의 위기에 처했다. 아마도 위생이 중요해졌던 시기의 도시가 하수로를 만들었던 것과 같이 도시는 더 많은 재원을 방역과 감염병을 대처하기 위해 투입할 것이다. 특히 재정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대도시는 더 촘촘한 방역망을 준비하고, 인력을 투입하고, 대형병원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음압병실 등 의료시스템과 의료진을 보강할 것이다.
다만 지금 도시가 맞닥뜨린 도전은 초기 도시가 해결해야 했던 위생문제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만일 기존의 ‘생산하는 도시’로 돌아가려는 시도와 맞물린다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문제들을 나열만 해봐도 알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한파,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이 자동화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며 생겨난 고용불안, 집중된 주거형태와 땅값 상승으로 인한 불평등 확대... 대부분 현재의 대도시 인구밀도와 생산구조를 유지하면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지금은 ‘건강한 도시' 패러다임을 새로 구축하되, 단순히 개인의 생물학적 건강만을 챙기는 위생도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고, 생물학적 건강만이 아니다.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하고, 사회구조적 건강이 회복되어야 한다. 사회적 회복력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도시로 가는 초회복의 과제다. ‘사회적 회복력’이란 무엇일까? 현미경을 대고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초회복 도시의 네 가지 조건
1) 다양성의 회복
도시는 원래 생산의 거점에서 다양성의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힘을 얻었지만, 모든 도시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울산은 자동차로, 거제는 조선으로, 포항은 철강으로 정리되는 한국의 산업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특정한 산업에 지나치게 기댄 도시들은 사회적 회복의 국면에서는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조선업이 위기를 겪던 시절 거제시의 모습은 하나의 산업이 그 지방의 특성산업으로 자리잡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위기를 잘 드러내 주었다. IMF 구제금융위기도 겪지 않았다던 거제시는 인구의 40~50%가 조선소를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시작되었던 조선업의 위기는 도시 전체를 위기로 몰아갔다. 산업도시인 거제시는 전국에서 출생률이 비교적 높게 유지되던 도시였다. 2015년까지도 출생률이 2.3명 정도로 타 지역보다 높았지만 산업도시의 위기는 출산율을 30%나 떨어뜨리면서 한국의 러스트벨트가 되었다.[2] 특히 하나의 산업을 주축으로 그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도시의 산업구조는 위험의 외주화 속에 취약성을 점점 더 높여왔다.
최근 군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GM 군산공장 등 군산 경제를 지탱하던 자동차, 조선, 화학산업의 동반 침체는 노동자의 삶만을 죄여온 것이 아니라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것은 경북에 이어 전국 최고의 공실률을 기록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3] 도시의 성장은 경제활동으로 인한 활력에 기초한다. 따라서 도시가 하나의 산업에 의존하는 구조는 산업침체와 함께 도시의 몰락과 이어질 수 있어서 도시 자체의 회복탄력성을 저하시키는 요소이다. 울산이나 기타 산업도시들 뿐만이 아니라 관광산업에만 지나치게 기대는 도시 역시 취약성이 높아진다.
도시가 초회복을 위해 가장 고민해야 할 부분은 도시의 다양성이다. 회복탄력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알려진 일반적인 원칙 중 하나인 다양성은 획일화된 도시계획이나 특성 산업의 육성과는 대치되는 개념이다.
생태적으로도 단일종에 의한 경작이 외부 충격에 가장 취약하다. 퍼머컬쳐(Permaculture, 영속농업)나 혼합농이 지속가능한 농업이 될 수 있는 이유 역시 다양성과 모듈성이 지속가능성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워커와 설트(Walker and Salt(2006))는 <Resilience Thinking>에서 사회의 회복탄력성을 다양성, 생태적 변동성, 모듈성, 느린 변수에 대한 이해, 확실하고 밀착된 되먹임 관계, 사회자본, 혁신, 협치의 다단계성, 그리고 화폐화 되지 않은 생태계서비스에 대한 가치의 이해를 꼽았다. 루이스와 코내티(Lewis and Conaty (2012)) 역시 <The Resilience Imperative>에서 다양성, 모듈성, 사회자본, 혁신, 중첩성, 밀착된 되먹임 관계, 생태계 서비스 등 7가지가 사회생태시스템의 회복탄력성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라고 보았다. 다양성과 함께 도시의 기능을 모듈화하거나 중첩할 수 있다면, 특정 기반이 약해질 때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하철이 가는 곳에 버스 노선도 유사하게 배치를 함으로써 지하철이 멈추어도 사람들이 버스를 통해 이동할 수 있어서 다른 기능이 마비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를 변화시켜야 할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자전거나 개인 모빌리티와 같은 녹색교통이 환경을 개선하고 에너지 효율화로 인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인프라를 늘림으로써 접촉을 회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도시의 기능을 유지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회복탄력성을 강화시켜 준다.
2) 사회자본과 혁신
사회자본과 혁신은 일자리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미 하나의 직장에서 은퇴를 맞는 시대는 지나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협상할 것이 아니라 누구도 정규직일 수 없는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IT업종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가 함께 일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단순 직업교육이 아닌 협동의 철학과 시민교육,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역량강화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자본은 협력의 기초가 되고, 그 결과물은 혁신이다. 온라인 교육의 가장 큰 단점은 네트워킹의 어려움이다. 도시는 이들이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을 주어야 한다. 특히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동네마다 사람들이 흩어져 모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기획해야 한다. 소수의 특혜받은 사람들이 점유하는 마당이 아니라 공공이 제공하는 공원의 다양한 형태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은 도서관이나 자치센터를 이용한 더 많은 공론의 장, 더 많은 교류의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가 도시 혁신의 핵심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공된 공유 사무공간이나 공유 하우스는 참여자들의 실질적인 교류의 기회를 높이지 않았음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떠나 협력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을 엮어가는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며, 이는 공동체 활동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될 가능성이 높다.
3) 생태계서비스와 지역화
도시의 환경이 중요해지는 것은 접촉을 줄이면서도 답답한 거주공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경의 질은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새천년생태계평가보고서(Millennium Ecosystem Assessment, 2005)는 생태계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삶의 질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삶의 질에 기여하는 여러 가지 생태계서비스가 감소되고 있다. 수질이나 대기의 질을 개선하는 자연적 정화능력이 점차 줄어들고 기후를 조절하는 능력도 감소하고 있다. 단순히 오염 부하가 증가하기 때문에 공해가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원개발이나 서식지 파괴 등 자연자원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이는 생태발자국의 적자 규모나 용량 초과의 날 등을 통해서도 이미 경고되던 바이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같이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규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알아내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가 발생할 경우 대처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단순하고, 단기적인 영향으로 결과가 드러날수록 오류를 대처하기가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밀착한 되먹임 관계가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방법이 된다. 이미 복잡다양한 거대도시에서 이러한 되먹임 관계를 만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네트워크의 지역화가 중요하다.
4) 도시와 농촌의 상생
코로나 위기로부터 우리가 도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인구의 90% 이상의 삶을 도시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90%의 삶을 책임지는 것은 도시가 아니라 식량을 생산하는 농촌이다.
코로나발 국가간 봉쇄조치로 무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기업들이 부품 공급 및 수입에 차질을 빚음으로 인해 생산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일부 국가가 농산물 수출을 금지하면서 식량안보가 취약한 국가들에겐 위협이 되고 있다. 곡물자급률이 25%를 밑도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식량안보에 대한 논의가 보다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는 식량을 소비만 하는 곳이 아니고 농촌은 생산만 하는 곳이 아니다. 도시도 생산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농촌도 소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식량뿐 아니라 에너지 역시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원전과 화력발전소와 같은 집단 에너지를 생산하는 곳은 모두 지방이다. 그럴 이유가 없다. 도심에서 소규모 생산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마이크로그리드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노르베르 호지는 <로컬의 미래>에서 “글로벌화로 인한 손상을 만회하는 가장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이 지역화”라고 한 바 있다. 그는 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지역화라고 강조한다. 코로나로 인해 긴급재난지원금이 지역화폐로 지급되면서 사람들의 의식에 분명하게 각인 된 점은 지역내 소비 원칙이다. 이것은 지역경제에 대한 인식제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비대해진 대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리질리언스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재발견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만 된다면 코로나는 우리에게 위기가 아닌 진정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오래된 미래
1964년 영국 BBC 한 프로그램에서 아서 클라크는 2000년대가 되면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되어 출퇴근(Commute)이 아닌 소통(Communication)을 하게 될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는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소통이 주류가 되어버린 이 시점에 그의 예언은 ‘성지글’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모이지 않고 소통할 수 있다면, 서울의 광화문과 강남으로, 뉴욕의 로어 맨해튼으로, 런던의 뱅크역으로 가장 화려한 건물과 가장 소득이 높은 사람들과 가장 좋은 음식점과 문화시설이 모두 모여 가장 비싼 땅값을 형성할 이유는 없다. 각자 흩어져서 자신의 지역공동체와 취미공동체를 기반으로 살아가다가, 원거리 비대면 소통을 통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논하고 대규모 거래를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아서 클라크의 성지글처럼, 중요한 것은 대면이 아니라 소통이기 때문이다.
초회복의 도시 전략에서 ‘로컬'이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1] 출처: https://courses.lumenlearning.com/boundless-ushistory/chapter/the-rise-of-the-city/ [2] 한국경제, “흔들리는 조선업 도시 '거제'…'하면 된다' 정신 퇴색하고 빈 상가만” (2019.6.1.), 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1905280616b [3] 전북일보, 군산 경기침체 장기화…소규모 상가 공실률 '전국 최고치' (2020.5.27.), https://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2083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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